_엮는이 주연
이번 학기 서울대학교 학점교류를 신청했다. 국내 교환학생 개념으로, 원하는 수업을 골라 듣고 학점을 채울 수 있다. 나는 우리 학과의 실기 수업 하나와 건축사를 선택했다. 건축사를 선택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건축 동아리에 반년동안 있으면서도 건축을 잘 몰랐다. 건축과 학생들과 건축에 대한 대화를 하면 나는 보통 “오..” 또는 “아..!” 등을 맡는 편이다. 잘 듣는 연습도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나의 상황이 마냥 싫진 않았지만, 조금 더 정확한 지식을 갖고 싶었다.
두번째로는 대학에 들어와 시작된, 나의 역사 과목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역사를 그닥 좋아하진 않았다. 뭔가 단어의 발음도 상당히 고루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나의 근거없는 편견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대학에 들어와 나의 관심을 끄는 과목들은 모두 ’사‘자가 붙어있었다. 철학사 건축사 디자인사 등…. 이런 과목들의 매력이라면,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사상과 그로부터 제작된 인공물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멀리서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흔히 모더니즘, 르네상스 등으로 구분되는 시대의 흐름에는 나름의 합리성이 있고, 이런 합리성은 현재에도 참고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혹은 개인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흐름도 존재한다. 그런 흐름은 도대체 왜 나온 것인지도 분명히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심지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로를 잘 ‘까고‘, 반박을 기반으로 기발한 발상을 전개하고, 과거의 것을 새롭게 뒤바꿈한 흐름을 보는 것은 실제로 재미있는 일이다.
아무튼 그런 모종의 이유로 나는 서울대학교까지 가 건축사를 선택했다.
2. 시차 9시간
첫 시간은 오리엔테이션이었다. 그러나 수업은 줌으로 진행됐다. 이유는 교수님께서 영국에서 비자 문제로 인해 출국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서울대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싶어서 아쉬웠지만 앞으로 수업이 많으니 조금만 기다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주차 역시 같았다. 3주차가 지나고, 4주차가 지나고.. 수업은 여전히 줌으로 진행됐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줌으로 진행되고 있다. 교수님은 대체 영국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걸까? 한번도 실제로 본 적 없는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교수님, 영국에 정착하신 건가요? 거기 물가도 비싸고 음식도 맛없던데요…. (물론 나도 몇달 뒤면 가긴 하지만) 줌 화면에 작게 비친 교수님의 묵묵한 표정이 어쩐지 아련하게 느껴진다. 나는 서울(사이버)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3. 에로티시즘의 미학
어쨌거나 교수님의 줌 수업은 즐겁다. 즐겁다기보다는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몇가지 기억에 남는 것들 중 하나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에로티시즘의 미학’이다.
일본의 카츠라 궁은 건축가 Bruno Taut가 일본의 모던 건축 구현에 매우 핵심적인 건축물로 보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특히 주목할 곳은 ‘Moon Terrace’라는 외부와 연결되는 공간이다. 이름으로만 보면 달이 보이는 테라스 정도로 유추할 수 있는데, 사실은 그보다 좀 더 흥미로운 관계성을 읽어낼 수 있다.
카츠라궁의 내부에서 보이는 외부 풍경.
이 테라스를 건물 내부에서 바라볼 때, 사진과 같이 좌우와 상부의 창호는 우리의 시야를 제한하는 하나의 프레임을 만든다. 따라서 건물 내부에서 프레임을 통해 외부를 보면, 하늘의 달이 바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시야와 수평을 이루는 자연 풍광만이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공간은 이름과 달리 하늘에 있는 달이 보이지 않는 곳인데, 도대체 왜 이런 이름을 택한 것일까? 사실 Moon Terrace는 달을 ‘직접’ 관측하는 공간이 아니다. 밤에 어두운 호수에 비친 달을 프레임을 통해 목격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달을 보는 공간이다.
바로 여기서 '건축적 에로티시즘'이 발생하게 된다. 여기서 에로티시즘이란 '완전히 드러나지 않고, 간접적이고 미묘하게 느껴지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인간관계에 비유하자면 이렇다. 예컨대 일상 속에서 아주 가깝진 않지만 궁금한 누군가를 마주할 때, 우리는 상대를 완전히 알지는 못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긴장감과 기대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단순히 어떤 사람에 대한 정보의 부재에서 오는 불편함이나 답답함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상대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가 적당한 환상과 기분 좋은 막연함 속에 존재하는 것에 가깝다.